고려시대
이궁(離宮)이 있던 자리
청와대 부근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숙종 때인 1104년 무렵 고려의 이궁이 이 곳에 들어서면서 부터입니다. 고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도읍이었던 개경(지금의 북한 개성)과 함께 서경(평양), 동경(경주)의 세 곳을 삼경으로 두었는데 숙종 때 동경 대신 이곳에 이궁을 설치하고 남경으로 삼았습니다. 남경이란 ‘남쪽의 서울’ 이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조선시대
경복궁의 후원터
청와대 자리가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도읍을 옮기자는 주장이 시작되면서 부터였습니다.
조선의 첫 임금인 태조 이성계는1394년 새로운 서울을 세우기 위한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이라는 특별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관리들을 보내 궁궐터를 찾아보게 했는데 고려 숙종 때의 이궁 자리는 너무 좁아서 새로 궁궐을 짓기가 어려우므로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서 궁궐을 지어야 한다고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즉, 오늘날의 청와대 터에서 좀 더 내려간 평지에 왕궁을 짓기로 한 것이지요.
태조는 그 해 12월 정도전으로 하여금 궁궐 짓는 일을 시작하도록 했고 이듬해에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9월에 궁을 완성하였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궁이 바로 경복궁입니다.
경복궁이 완성된 뒤 세종 8년인 1426년 현재의 청와대 자리에 경복궁의 후원(뒤뜰)이 조성되었습니다. 이때 후원에는 서현정, 연무장, 과거 시험장이 만들어졌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경복궁과 이 곳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습니다. 경복궁과 그 후원인 지금의 청와대 근처는 270년 동안 방치되었다가 고종 2년인 1865년 흥선대원군의 노력으로 다시 지어졌습니다. 이 당시에 함께 건축되어 후세까지도 이름을 남기게 된 경무대도 지어졌는데, 경무대는 창덕궁 후원의 춘당대 뒤를 이어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장’으로서의 기능을 이어갔습니다.
경복궁은 고종 33, 건양 1(1896)년 소위 아관파천으로 고종 황제가 경운궁으로 떠나자 정궁으로서의 위상이 급속히 추락했습니다. 고종이 이어(移御)한 경운궁은 대한제국 황궁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증축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대 청와대 자리 사진
일제 강점기 시대
청와대 자리
1929년 조선총독부 통치 20주년 기념으로 개최한 조선박람회가 경복궁과 옛 후원 자리에서 열리면서 이 곳의 조선시대 및 대한제국 건물들은 대부분 철거되었습니다. 일제는 1937년부터 1939년에 걸쳐 조선박람회 이후 한동안 공원으로 남아있던 옛 후원 자리에 조선 총독의 관사를 지었습니다. 이후 조선 총독의 관사 일대를 경무대라고 불렀습니다.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이화장에서 일제 총독 관저였던 경무대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경무대는 제4대 윤보선 전 대통령 시절부터 ‘청와대’라는 지금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푸른 기와의 청와대로 불리고 있습니다.
주요시설
청와대본관
영빈관
상춘재
녹지원
춘추관
대통령관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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