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3대 악녀

여태후(呂太后-BC241~180)
중국 漢나라 시조 유방의 조강지처로 그가 죽은 뒤 어린 아들이 즉위하면서 실권을 잡고 악행을 저지른 인물이다. 漢나라가 안정을 찾아가자 훗날의 후환을 우려해서 한신(韓信)을 비롯한 개국공신들을 하나둘씩 제거해갔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한 고사성어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유래다.
여후의 이런 계략이 한나라가 안정적인 통치권을 유지하는데 기여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유방이 한고조가 되어 12년 만에 죽자 어린 아들 혜제(惠帝)를 즉위시키고 실권은 자신이 잡았다.
실권을 잡자 한고조가 총해했던 후궁 척희(戚姬). 척부인의 눈을 뽑아버리고 혀를 잘라 벙어리로 만든다음, 유황을 귀에 부어 귀머거리가 되게 한 뒤 팔과 다리를 잘라버렸다.
그러고 나서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척부인을 측간의 돼지우리에 던져 넣어 평생 똥오줌을 받아먹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인간돼지(인체(人彘))이다.
혜제가 23세의 나이로 죽자, 혜제의 후궁에서 출생한 여러 왕자들을 차례로 등극시키면서 황제의 권한을 대행하였는데, 자신의 친족인 여씨 일족을 고위고관에 등용시켜 사실상의 여씨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녀가 죽자 여씨 일족들은 대신들에 의해 모두 숙청되거나 요직에서 쫓겨났고 한나라에서의 여씨 천하는 막을 내리게 된다.
사마천은 "여태후 시절에는 형벌을 시행하는 일이 드물었고, 죄인도 드물어서 치안이 좋았으며, 백성들이 농사일에만 힘쓰니, 입고 먹는 것이 갈수록 넉넉해지는 태평성대"였다고 여태후의 공로를 칭송했다. 게다가 "지배층 내부에서는 피터지는 권력싸움의 연속이었지만, 여태후가 통치를 잘한 덕분인지 백성들의 삶은 평안했다"는 것이다.
아무 힘이 없는 백성과 일반 관료들에게는 관대한 편이었다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년)
당(唐)나라 황제가 된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년)는 姓은 ‘무(武)’씨로 14세에 황궁에 들어가 궁녀로 있다가 중국최초의 여황제가 되었으며, 권력을 위해서는 친 자식을 둘이나 살해할 만큼 잔인했다.
그는 7세기 후반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를 손에 쥐고 쥐락펴락했던 전설 같은 여인이다.
측천무후는 부군인 당태종이 죽은(649년)후 관례에 따라 다른 궁녀들처럼 비구니가 되었다가 태종의 아들인 고종의 사랑을 받아 다시 궁궐로 돌아왔다.
태종의 후궁이 되었으나, 사랑을 받지 못하다가 고종의 후궁이 되어 야심을 키워갔다.
고종황제의 황후를 모함하기 위해 어린 자기아들을 죽여 황후에게 뒤집어씌워 모함해 황후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올라간 그녀는 고종을 압박해서 ‘천후’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실권을 틀어쥐었다. 완벽한 지혜로 냉담함과 치밀하고도 명료한 결단력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악행을 저지른 악질적인 지도자였으나, 전대미문의 여성 황제였던 측천무후는 67세(690년)에 황제가 되어 82세까지 15년 동안에 남다른 통치방법으로 휘두른 지배욕의 극치는 평가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녀는 신분보다는 능력을 우선시하는 파격적인 제도를 시도했다.
비천한 궁녀가 황제에 오르기까지 겪었을 수많은 역경을 정치력으로 해결한 권력에 눈이 먼 냉혹하고도 잔인한 그리고 현명하리만치 뛰어난 전무후무의 여성정치가였다.

서태후(西太后 1835~1908)
청나라 9대 황제 함풍제의 황후로, 자금성에는 황후가 두 명이 있었는데 동쪽 처소에 기거하는 황후를 동태후, 서쪽 처소에 기거하는 황후를 서태후라고 했기에 그녀가 서태후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17살에 자금성 궁녀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녀는 출중한 외모와 말재주로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처음에 후궁이었으나 유일하게 아들을 낳아 황후가 된다.
함풍제는 이른 나이에 죽게 되자,
서태후의 아들인 동치제가 6살의 나이에 황제로 즉위하면서 섭정을 하게 된다.
동치제가 친정을 할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 아들에 대한 애정보다 권력욕이 컸던 서태후는 아들 동치제와 권력 다툼을 벌인다.
이때, 동태후는 함풍제의 유서로 서태후가 함부로 행동을 못하게 막지만, 서태후는 잔꾀로 동태후 스스로 함풍제의 유서를 불사르게 만들고 아들 동치제는 주색잡기에 빠지게끔 방치한다.
결국 동치제는 20세에 성병으로 죽고 며느리또한, 거짓 죄명을 씌워 죽인다. 이후, 4살짜리 조카 광서제를 황제로 앉혀놓고 마음껏 권력을 주무른다.
서태후는 일단 사치가 매우 심했다고 한다. 황실 역사상 최고라고 한다. 그녀의 밥상에는 주식으로 30가지, 반찬으로 128가지의 산해진미가 올라왔는데 이 한 끼 상차림에 은 100만 냥이 들었다.
은 100만 냥은 당시 중국 농민들의 약 1년 치 식량이었다한다.
서태후의 사치는 옷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옷이 무려 3,000여 벌이나 되었으며 서태후의 옷, 버선과 신발을 만드는 데만 매년 3,000명 가량이 동원되었고, 그 비용은 매년 10,000냥 정도가 들었다고 한다.
청일전쟁 당시 북양 함대의 예산을 빼돌려 자신의 별장 이화원을 꾸몄다고 한다.
이화원에 쓴 은전 3,000만 냥은 당시 청나라 전체 1년 예산의 30%에 달하는 수치로 이 막대한 돈이 정원 건설에 낭비된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서태후는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던 청나라의 마지막 버팀목이기도 했다.
서태후라는 강력한 구심점이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가 완전히 분해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서태후가 단기적으로는 청나라의 버팀목이 되어줬을지라도,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청나라의 걸림돌이 되어버린 셈이다.